그녀는 매주 수요일 오후 세시에는 평생교육원에서 하는 수필 쓰기 수업을 듣는다. 한 달 전부터 이 수업을 듣고 있지만 지금까지 한 편의 글도 쓰지 않는다. 그녀는 강사가 자기를 골탕 먹이기 위해 그런다고 오해를 할까 봐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사실 수필 쓰기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단지 스스로 짜 놓은 정교한 일정표에 맞추기 위해 매주 수요일 오후 세시에 하는 수필 쓰기 수업을 듣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정교하게 짜놓은 일정에 맞추어 청소를 하고, 천변에 나가 산책을 하고 TV프로그램을 보는 일상의 평화를 즐기며 살고 있다.
그녀는 결혼 후 남편과 함께 야채가게 옆에 조그만 매대를 빌려 과일장사를 시작하였다. 남편의 능력보다는 그녀의 억척스러움과 영리한 장사수완으로 자신의 과일가게를 차리고, 그렇게 번돈으로 집도 사고, 딸아이의 대학교육도 시켰다. 남편이 죽고 나서 홀로 가게를 지켜오다가 체력이 부쳐 과일가게를 그만둔 지도 6년이 되었다. 일흔이 넘은 나이의 그녀가 홀로 지낸다는 것을 종종 안쓰럽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그녀는 형광등을 갈아 끼우는 일 정도는 스스로 할 수 있었고, 혼자 있으면 누군가의 뒤치다꺼리를 하지 않아도 되고, 누군가로 부터 귀찮은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는 이 평화로운 생활에 만족하며 살고 있다.
평화로운 일상에 끼어든 시끄러운 앵무새
이러한 일상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사흘전 사위가 찾아와 맡기고 간 앵무새 때문이다. 사위는 아이들이 애완동물을 키우고 싶다고 하여 애들 엄마가 추천하는 앵무새를 키우기 시작했는데, 정작 아이들은 앵무새를 무서워하고 아이들이 앵무새를 키우려면 준비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며 한 달 간만 맡아 달라고 하였다. 그녀는 어릴 적 딸이 병아리를 사다가 닭이 될 때까지 기르곤 했고, 처치 곤란하게 커버린 닭들이 치워 버린 날에는 울먹이며 닭들을 찾던 딸아이의 얼굴이 떠올라 사위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앵무새를 맡기로 한다.
그런데 이 앵무새는 사료가 담긴 밥그릇을 엎고 깃털을 여기저기 뽑아 놓아 새장 주변을 너저분하게 만들어 놓는가 하면 시끄러운 비명소리까지 질러대는 등 신경에 거슬리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렇게 한주를 보내고 다음 금요일 앵무새의 상태가 영 이상하여 앵무새를 진료할 수 있는 동물병원을 찾아간다. 동물병원의 의사는 그녀에게 앵무새는 관심이 많이 필요한 동물이라서 새장에서 자주 꺼내주고 놀아주기도 하고 그래야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외로워서 죽는다고 한다. 의사의 말에 그녀는 없어진 닭을 찾아 울먹이던 어린 딸의 얼굴이 다시 떠올라 앵무새를 죽일 수는 없었다. 그녀는 앵무새 키우는 법을 검색하여 배우기 시작하고, 거실바닥을 걸어 다니며 20분마다 싸놓는 앵무새의 똥을 치우러 다니는 고역을 치른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새는 쓰다듬어 달라고 머리를 기울이기도 하고 스스로 새장문을 열고 나와 잠든 그녀의 배 위에 앉아 있기도 한다, 그녀는 새의 이런 행동이 귀여워 보이기 시작하고 이렇게 약속된 한 달이 지나간다. 그즈음 사위는 한 달만 더 앵무새를 맡아달라는 전화를 하고, 그녀는 한 달 정도는 더 맡아주기로 한다.
여느 때처럼 설거지를 마치고 천변을 산책하는데 선선한 여름날 저녁에 산책하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산책로는 활기차다. 그런 산책로에서 외로움이라도 느껴진 걸까? 누군가와 통화가 하고 싶어 딸에게 전화를 걸어 보지만 전화를 받지 않는다. 문득 집에 있을 앵무새가 생각나고 며칠 후 그녀는 인터넷에서 알려준 대로 앵무새가 새로운 환경에 놀라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하여 산책을 나선다.
그녀는 앵무새가 든 새장을 들고 다른 사람들과 나란히 산책하며 걷는 것이 좋다. 앵무새도 신나서 소리를 지른다. 지나는 사람들은 앵무새가 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며 웃는다. 사람들이 그녀를 쳐다보며 웃을 때면 숨고만 싶었던 어린 시절과 지난일들이 생각난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할머니 집에서 살았던 어린시절 첫사랑이었던 옆집 춘식이 삼촌도 생각나고, 중학교 친구 점선이도 생각난다. 딸아이가 학교 운동회에 와달라 했을 때 못 가본 일도 과일트럭 때문에 경비원과 싸운 것을 딸이 보고 엄마가 창피하다고 말했을 때, 남편이 대장암 선고를 받았을 때, 손자들을 태어났을 때도 떠오른다.
앵무새가 답답할까 봐 슬그머니 새장의 문을 열어준다. 인터넷에는 환경이 바귀면 앵무새가 본능적으로 날아갈 수도 있다고 하여 걱정스럽기도 했지만 다행히도 새는 그녀의 품속으로 파고든다.
그렇게 앵무새와의 시간을 보내고, 사위에게 전화가 오고 앵무새는 딸의 집으로 갔다. 간간히 딸과 사위는 앵무새의 동영상을 보내온다. 어느 겨울날 내다 버릴 것을 정리하다가 수필 쓰기 수업에 들고 다니던 노트 속에서 앵무새가 남기고 간 솜털하나를 발견한다. 노트의 빈페이지에 '앵무새가 가 버렸다'라고 써보았다. 그리고 앵무새와의 기억을 떠올린다
그 시절 앵무새는 그녀에게 전부였고, 앵무새에게도 그녀가 전부였다.
삶에 위안을 주는 앵무새
그녀가 평화롭다고 하는 일상은 평생동안 여러 사람들과 부대끼는 인생을 살아오다 보니, 혼자 지내는 것이 편안하다는 착각(?)을 하면서 지내는 것처럼 보인다. 관심과 보살핌이 없으면 외로워 죽을 수도 있는 앵무새는 그녀의 모습과 비슷해 보이고, 그런 앵무새와 마주 하는 그녀는 자신의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앵무새와의 시간을 즐기는 듯하다.
우리가 흔히 학창시절 즐겨 듣던 흘러간 옛 노래를 듣다 보면 그 시절 아련한 기억들이 떠오르는 것처럼 그녀의 앵무새도 비슷한 역할을 해준다는 생각이 든다. 그 시절 기억이 즐거울 수도 그렇지 않을 수 있지만, 웬만하면 좋은 기억으로 떠올리는 것이 즐겁다. 언제나 삶은 고단한데 옛날의 기억이라도 행복하고 즐거울 수 있다면, 살아가는데 있어 조금의 위안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도 삶에도 앵무새가 나타나 서로 보살펴 주며, 즐거은 추억을 회상하며 살아갈 수 있었으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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