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미 가수의 꿈을 접었고 2년간을 버티면 마련할 수 있는 내일채움공제의 천만원을 목표로 꿋꿋하게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언니는 드라마작가의 꿈을 갖고 지낸 8년간의 시간을 뒤로하고 그 꿈을 포기하기로 하였고, 나처럼 아니 모두가 그렇듯이 개미지옥으로의 길을 가기로 어제 합의했다. 그런 언니를 달래주기 위해 나는 연희동으로 향했고, 우리는 늘 그랬듯이 만나서 술을 마시고 동네를 거닐었다.
첫번째 : 아그리파 술의 집
내가 보기에는 지루한 내용의 글을 쓰는 언니에게 재능이 있어 보이지 않았지만, 언니가 다니던 교육원의 담임이었던 은단은 언니에게 재능이 있다고 칭찬했었다. 그 칭찬이 8년의 세월을 낭비하게 했다며 언니는 복수를 하기 위해 은단의 인스타를 보고 그녀가 운영하는 술집 '아그리파 술의 집'을 찾아간다. 하지만 은단을 연모하고 짝사랑하는 언니는 주사만 부리다가 언니의 재능에 관한 은단의 말에 술집을 나와버렸고, 세상에서 가장 자기가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한다. 하지만 청년내일저축계좌의 가입조건 같은 것이나 머릿속에 외우고 다니는 나와 같은 사람이 진짜 불행한 사람이라는 것을 언니는 모를 것이다.
두번째 : 연희고지
전쟁기념비가 있는 연희고지를 향한다. 돌계단을 오르자 한미해병대가 여기서 적을 무찔렀고 수도탈환에 기여했다는 내용과 함께 우뚝 솟은 거대한 전적비가 보인다. 언니는 뭔가를 무찌르고 지켜내어 꿈을 이뤄내어 자신의 전적비를 세우고 싶었으나 모호한 짝사랑만 남은 현실에 눈물을 흘렸고, 우리는 낡은 두마리의 곰인형처럼 초라한 모습으로 꼭 끌어안았다.
세번째 : 푸대접 포차 (목마와 미나리아재비)
쓸쓸한 마음에 술이 많이 취해도 될 것 같은 그런 날 나는 큰 이모를 떠올린다. 맛은 없지만 안주가 무척 싼 푸대접포차에서 나는 언니에게 전에도 한 적이 있는 큰 이모의 이야기를 꺼낸다.
큰 이모는 위장취업한 대학생들의 데모에 정신이 없었고 자신 또래의 청년들이 사회를 바꾸려고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그녀는 사회가 싫어 엿장수를 하며 떠돌이로 살려고도 했지만 실패하고 다시 돌아와 공장에 다녔고, 벌집에 살면서 요정에 나가는 옆방 여자를 사랑했고, 그 여자를 잊지 못해 평생 혼자 살았다. 그 후 내몰린 철거민들이 자리 잡았던 곳인 수색에 정착한 큰 이모는 막냇동생이 혼자 낳은 아이인 나를 데려다 키웠고, 미용기술을 배워 여자들로 북적이는 미용실을 냈다.
할 말 못 하고 끙끙 앓는 큰 이모 이야기를 하며, 우리는 할 말은 하면서 살자고 서로 다짐한다. 그러나 큰 이모처럼 언니도 은단에게 고백을 하지 않을 것이다.
네번째 : 촛불 끄는 사람들
집에 가겠다는 언니를 데리고 단골 LP바로 향한다. 장식장안에 골동품이 가득한 언제나 같은 분위기의 이곳은 손님의 신청하는 음악을 틀어준다. 신청곡을 받아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음악을 틀어주는 이 집 사장의 직업이 부럽기도 하지만 팬데믹 힘든 자영업자들을 떠올리며 사장님도 많이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든다.
언니는 모든 사람은 세우고 싶은 단 하나의 비가 있다고 하고, 나는 그것을 세우기 위해 희생해야 하는 것들을 생각하면 차라리 그때그때 순간을 살아가는 것이 맞다는 생각을 한다. 술값을 계산하고 나오는데 '92년 장마, 종로에서'라는 노래가 흘러나오고 언니는 이 노래만 다 듣고 가자고 한다. 이 노래를 들던 언니는 자기가 시대의 등불이라는 생각이 든단다. 그리고 언니는 족쇄를 차겠다고 한다.
다섯번째 : 홍제천을 지나는 길
밖으로 나와 홍제천을 지나는 길을 골라 걷는다. 교각아래 끊어진 배수관 속에 잠든 비둘기가 보이고, 언니는 교각에서 '혁명은 끝났고 착취는 계속된다'는 그라피티에 쓰인 문장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바라는 세상이 있어 나는 노래를 불렀고, 언니는 글을 썼는데 모두 실패했다.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커녕 바라는 집에서조차 살지 못하고 더러운 배수관속에 잠든 비둘기처럼 그렇게 살아간다. 하지만 함께 걸을 수 있다는 것에 위안 삼아 다시 걸었다.
어딘가에서 20세기의 전쟁이 반복되고 있는 동안 우리는 21세기에 져서 꿈을 버린다.
전적비에 새겨진 젊은 희생자들, 세상을 바꾸어 보려던 애쓰던 위장취업한 대학생들은 20세기를 살면서 세상에 도전하고 투쟁하였지만, 현재 21세기를 사는 세대들은 많은 것을 포기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 누구의 잘못이라 할 수도 없이 돌아가는 세상의 현실이 그러한 듯하다.
꿈을 저버렸다고 인생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꿈은 언제나 다시 꿀 수 있는 것이고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변전소에서 열심히 끊기지 않고 흘러가는 전기소리처럼, 끊임없이 열심히 살아가다 보면 누구에게나 좋은 날이 올 수 있다는 기대가 당연한 세상이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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