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디메이드인생이 임자를 만나는 과정
P는 그 시절 표현으로 인텔리이지만 살아가기는 궁핍하기만 하다. 취업을 하기 위해 알고 지내던 선배에게 부탁하여 신문사의 사장을 찾아가 보지만 거절당하고 나온다. 사장실에서 나오며 선배를 마주치지만 거절당했다는 말을 하기엔 창피하기만 하다. 신문사를 나와 봄 하늘 맑은 날을 보니 어디론가 떠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곧 현실의 본인의 처지를 파악하고 단념한다.
지식만 있으면 누구나 양반이 되어 잘 살 수 있다고 방방곡곡에서 떠들어 대고, 민간에서도 학교를 설립하는 등 민관이 협력하여 지식의 보급에 힘쓴다. 그리하여 일부 지식인 무리는 벌이도 좋고 윤택한 삶을 산다. 하지만 전문지식이나 기술 없이 대학의 졸업증서나 보통의 상식만을 가진 인텔리들은 개밥의 도토리 신세다. P는 개밥의 도토리 신세인 본인의 처지와 세상이 짜증 나고 원망스럽다. 담배가게 주인에게 호기를 부리며 비싼 담배를 사지만, 두 달 치나 밀린 방세와 전기불값 그리고 끼니까지 걱정한다.
P에게는 형에게 맡겨놓은 아홉살난 아들 창선이가 있다. 작년에 P의 형은 창선을 보통학교에 입학시키지만 극빈한 형편 탓에 학비를 대지 못하고 창선은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다. P는 창선을 공부 말고 일이나 시킬 것을 요구하지만, P의 형은 큰아버지의 도리로 그리는 하지 못하겠다며, 창선을 보낼 여비가 마련되는 대로 창선을 보내겠다는 편지를 보낸다.
P와 신세가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 동료인 M과 H가 찾아온다. H의 법률책을 잡혀 돈을 만들어 선술 집에가 실컷 술을 마시고 계집이 있는 술집까지 향하게 된다. P는 술집여자와 단둘이 남겨지고, 여자는 자고 가라며 이십 전을 요구한다. P는 그 소리에 더럽고 얄미운 마음에 가지고 있던 3원쯤 되는 전재산을 던져버리고 나온다.
어느 날 P는 다음날 아침에 창선이 경성역에 도착한다는 전보를 받는다. P는 잡지사에서 일하던 시절 알고 지내던 인쇄소를 찾아가 아홉 살 난 아들을 써 달라며 졸라댄다. 자식을 공부시키지 않으려는 P를 이해할 수 없지만 인쇄소에서는 그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한다. P는 한 짐 벗어놓은 듯 거뜬하고 마음이 느긋하다고 한다.
P는 정거장으로 나가 창선이를 맞이한다. 보따리를 손에 들고 차에서 내리는 어린 자식의 모습이 가엾어 보이고, 아랫목에서 잠을 자며 외롭게 꿈을 꾸는듯한 창선의 모습을 보며 애정을 느끼기도 한다.
이튿날 아침 P는 인쇄소에 창선이를 맡기고 내키지 않는 발길을 돌리며 나온다. "레디메이드 인생이 비로소 겨우 임자를 만나 팔리었구나."라고 중얼거리며...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살아가는 것은 비슷하다
"레디메이드 인생"은 이미 만들어져 나온 인생, 기성품 같은 인생이라는 의미이다. 한 사람의 인생이라는 것이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지고, 또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 팔려 나간다는 발상이 참으로 씁쓸하기만 하다.
적당한 대학을 졸업하고 , 무난한 기업에 취직하여 직장생활을 하고, 혼자서도 살아남을 만한 대책을 갖추지 못한 상태로 퇴직하여 어려움을 겪는 것은 요즈음에도 흔히 있는 이야기이다. 예전에도 겪었던 일이 현재에도 계속되는 것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살아가는 것은 비슷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고, 아무리 세상이 윤택하게 발전하였다 한들 이러한 어려움은 되풀이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 듯하다.
모두가 윤택하게 잘 사는 그런 시대는 아직까지는 없었다. 어느 시대나 낙오자는 있는 법이고,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또한 자신이 선택하여 걸어온 길에서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은 약간의 운 또는 약간의 노력의 부족으로 인한 것이지 그 길 자체가 틀린 길은 아닐 것이다.
P가 화이트칼라를 상징할 수 있는 인텔리와 블루칼라를 상징할 수 있는 인쇄소라는 단지 두 개의 선택지 밖에 주어지지 않아 아들의 미래를 선택했다고 한다면 창선을 인쇄소로 보낸 그의 행동은 그리 나무랄만한 행동은 아닌 듯하기도 하다. 단지 창선이의 어린 나이가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P도 인쇄소에 창선을 맡기고 나오는 발길이 내키지 않는 발길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늦기 전에 P가 살아갈 길을 찾아서 창선에게도 그가 가고 싶은 길을 선택할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기를 기다려 본다.
댓글